헤어질 결심

카테고리 없음 2024. 8. 14. 17:25 |

오랫동안 쓰지 못하고 있다가, 무엇이든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일단 대략적으로만 쓴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영화에서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바로 이 지점이 영화의 정점에 해당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사랑이 어떻게 인간을 붕괴시키는가에 대한 영화이고, 동시에 사랑이 어떻게 그 붕괴를 끊임없이 (그러므로 영원히) 유보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영화이다. 

 

<아가씨>가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과 같이, 이 영화 역시 명확하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붕괴되는(사랑에 빠지는) 해준과, 붕괴가 회복되는(파도치는 바다의 혼돈 가운데에서, 더이상 구두를 신지 않은 해준이 운동화의 신발끈을 다시 묶는 그 지점의) 해준. 

해준은 혼돈 속에서 비로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모든 것이 흩어지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바다 속에서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영화가 불륜을 다룬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인간을 붕괴시키는 강렬한 사랑이라는 것은, 이미 평온한/일상적인(즉 부부와도 같은) 사랑이라는 말과 형용모순되기 때문이다. 

 

해준을 중심으로 한 영화의 서사 구조가 너무나 강렬했으므로, 처음에는 서래가 해준의 사랑, 붕괴, 회복을 돕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력적인 연기에 속기 쉽지만, 살인 흔적을 감추어야 한다는 목적을 지닌 그녀가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계속 드는 의문은 왜 그녀의 할아머지가 광복군으로 설정되었을까 였다. 단순히 한국에 오게 하기 위한 장치일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소 과하게 느껴졌고, 어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잘 이해되지도 않았다. 

 

"그동안 너무 무거웠어요."

 

왜 그녀는 그러한 '무거움'을 해준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전까지, 즉 그를 위해서 스스로 붕괴되겠다고 마음 먹기 전까지, 계속해서 간직해야만 했던 것일까.

 

하지만 영화를 두 번째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는 진정으로 해준이 아니라, 서래의 붕괴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도한 미장센을 사용하여 산과 바다를 대립적으로 상징화하는 것의 의미도. 

 

서래의 할아버지는 산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서래의 어머니는 한국에 서래의 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 산에 관한 책과 할아버지의 유골을 품에 안고 서래는 한국을 찾는다. 즉 서래는 중국인이(한국인도) 아니다. "한국말을 잘 못해" 마침내 중국인처럼 보이는 서래에게 할아버지의 산은 궁극적인 정착지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착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다를 좋아하는 서래는 고소공포증이 있을 뿐더러, 한국에는 등산을 즐겨하는 기도수와 같은 인간들이 산을 선점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서래는 산을 되찾기 위해, 정착하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결국 그녀는 산에 무거운 짐을 버리고, 유동적이고 무의미한, 모든 것이 흩어지는 바다로 돌아간다. 붕괴되어, 영원히 해준과 헤어지지 않을 결심을 하고, 해준의 영원한 미제 사건이 되고, 결국 그렇게 해준과 헤어지지 않게 된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었떤 그녀는 산과 바다에 끼인 존재론적 조건을 지녔다. 살인사건의 해결이라는 구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목숨과도 같은 문제였을 것이다. 시체와도 같은 몸으로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 오면서도, 끝까지 산에 대한 책과 할아버지의 유골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서래가 '산'(정착)을 버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그것을 완성(정확히 말하자면 유보)하기 위해 서래는 비로소 자신이 있던 그곳, 바다로 돌아간다. 

모든 것을 붕괴시키면서, 영원한 혼돈 속에서 우리를 놓아 주지 않는 그곳, 바다로. 다시 말해, 사랑 그 자체로. 

 

* 그녀는 말한다. "헤어질 결심을 하려구요."

  이는 그녀가 영원히 사랑 속에 있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금연으로 비유하자면, 금연이란 완성될 수 없듯이, 다시 말해 금연은 담배 피는 것이 유보되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담배를 피지 않을 결심이다. 헤어질 결심은 결코 헤어짐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고, 헤어짐은 완수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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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사이트보다 저렴하다는 점에서 평소 티몬 쇼핑몰을 자주 이용해 왔다. 

그런데 얼마 전, 슈카월드에서 티몬 쇼핑몰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할인율이 비상식적으로 높은 상품권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돌려막기를 연상시키는 이것은, 일반적으로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암시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나는 홀린 듯이 티몬에서, 그것도 내가 주문할 일이 별로 없는 상당히 고가의 상품을 주문하고 있었다. 

 

결국 문제가 터졌고, 거짓말처럼 판매자측으로부터 상품 취소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예상대로 티몬으로부터 카드 취소가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티몬은 카드 취소가 불가하므로 현금으로 환불하겠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을 했는데, 아무런 사유 없이 카드 취소가 불가할 정도면 현금으로 환불하겠다는 것은 당연히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포털에서 티몬 환불과 관련된 글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자주 틀리는 예상을 해본다면, 이 티몬 사태는 소수의 사람들이 손해를 본 단순한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어느 누구도 적다고 생각하지 않을 금액을 심적으로 포기하고 난 후, 비싼 경험을 했다고 치기엔 그다지 의미 없는 경험이었으므로, 다만 다음 두 가지 점을 느꼈다. 

 

첫째, 코로나 이후 많은 이들이 경제에 거품이 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거품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주식이나 부동산의 호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이 티몬 사태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즉 이 티몬 사태가 거품이 꺼지는 혹은 경기 침체나 위기로 가는 하나의 길목이라면,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나의 어리석은 판단이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정확히 그 가운데에서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은 그다지 아깝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역사적 의미라면.

하지만 사실 티몬 사태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은 두 번째 이유와도 관련되는 것인데, 그것은 신용(카드)에 대한 나의  믿음과 관련된 문제이다. 

 

둘째, 따라서 이것이 더욱더 본질적인 것으로, 자본주의가 믿음의 신화라고 하는 상식적인 격언을, 그래서 머리로만 알고 있던 진리를 드디어 비로소 몸소 깨우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용카드를 지탱하는 것은 바로 신용 그 자체, 즉 믿음뿐이라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쇼핑몰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한 상품을, 상품을 받지 못해 환불 절차가 완료되었음에도, 황당하게도 카드 취소는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을 줄 나는 이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다.

티몬이 위험하다는 슈카의 경고에도 내가 홀린 듯 과감한 결정을 한 것도, 사실은 그냥 홀린 것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자본에 대한, 신용에 대한, 신용 카드에 대한, 그리고 쇼핑몰이 지탱하는 경제 시스템에 대한 너무나도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근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선입금한 것도 아니고, 대형쇼핑몰에서 카드로 결제하고 물건을 받지 못했는데 카드 취소가 불가하다고? 이전까지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용카드 혹은 자본의 흐름에 대한 신앙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견고한 시스템이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보이지 않는 허약한, 자본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만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EBS에서 여러 번 본 내용임에도, 이제서야 그것을 알았다. 

은행에 돈을 맡겼을 때, 우리집 금고에 있을 때보다도 그것이 오히려 더욱 안전하다고 나는 믿어 왔다. 

하지만 내가 맡긴 돈은 이미 은행에 없다. 더 많은 이자를 받고 누군가에게 대출되고 난 후이다. 내가 돈을 찾을 때, 그것은 내가 맡긴 돈이 아니라, 나 이후에 다른 사람이 은행에 맡긴 돈일 뿐이다. 즉 자본의 심장인 은행의 시스템은 폰지, 돌려막기와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핵심은 믿음이다. 그 어떤 정책적 뒷받침이 아니라. 

그러니까 철두철미한 정책적 보완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신용에 대한 믿음이 깨진 순간 뱅크런은 일어나게 된다. 언젠가 믿음이 깨지면, 그 돈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티몬 쇼핑몰이 소비자의 돈과 판매자에게 지급되어야 할 돈으로 (아마도) 돌려막기 폰지 놀음을 했던 것처럼, 티몬 쇼핑몰이나 은행은 본질적으로 구조가 같고, 그것이 견고하다는 사람들의 믿음 외에 그것을 지탱하는 그 어떤 견고한 시스템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자본주의는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허약하다는 것을, 믿음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은 꽤 값비싼 깨달음 혹은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경험이 아니라 그저 수업료였다. 

결론은 없고, 자본주의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그것에서 여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저 머리로만 알았던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2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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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카테고리 없음 2018. 7. 20. 13:42 |

'이름 없음'에 대하여 다시 적어 둔다. 


꿈 속에서 서로의 몸이 뒤바뀐채 만났던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서로 속해 있는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이란 것이 원래 그렇듯, 서로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이 기적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그 시간에

타키는 서로의 존재(이름)를 잊지 않기 위해 각자의 손에 이름을 적어 두자고 한다. 


그러나 정작 타키가 미츠하의 손에 적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스키다'였을 뿐. 


이런 수줍은 고백은, 단순히 낭만적인 이들의 감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언제부턴가 그런 기분에 휩싸여 지낸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계속 누군가를 찾고 있었어."



우리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러나 그 목적어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키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좋아한다'는 고백만을 미츠하의 손에 남긴 이유다. 


목적어가 존재하지 않는 감정.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배웠던 사랑의 본질이 아닌가.)


그 결핍을, 

영화는 판타지를 통해서 

충족시키지만, 


그래서 영화의 판타지가, 식상하지 않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이 시간도 결국 흘러갈 것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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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미는 리틀헝거와 그레이트헝거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실 아무 의미도 없고, 영화에서도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오직 헝거와 리치, 그리고 고양이만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등장시키는데, 일러(고양이), 혜미, 벤은 모두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혹은 어디에도 없는(상상 속에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슈뢰딩거적 존재이다. 


이처럼 혜미와 벤이 강렬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촌스러운 계급 영화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혜미를 아무말 없이 포르쉐에 태우는 종수의 존재를 그냥 바라보기 어려운 나로써는, 동시에 계급 갈등으로 보지 않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진실을 찾아 헤매는 유일한(그리고 너무 진지한) 존재인 종수는 결국 자신이 찾은 진실의 끝에서, 모든 것을 불태운다.


하지만 벤을 불태우고 옷을 벗어버리는 종수는, 대마초를 핀 상태로 불타는 노을 앞에서 옷을 벗어버리는 혜미와 정확히 같은 존재인 것은 아닌가? 그 허망한 춤과 시간은 종수의 그것과 오버랩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버닝이 최서해의 신경향파 소설에서 벗어나 더 나아가는 지점은 벤과 혜미, 그리고 종수를 몇 겹으로 중첩시켜놓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허무한 불꽃(노을)은, 다시 말해 벤의 대마초로 혜미가 불꽃의 춤을 추고,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던 라이터로 벤의 포르쉐를 태우던, 밖으로부터 내부로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그 강렬한 불꽃은, 일찍이 이창동 영화에서 잘 볼 수 없던 것이었으니, 여전히 이창동은 매력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젠더 감수성에 대한 이창동의 (무)의식적인 둔감함은, 외부자인 내가 보기에도 사실 조금 불편한 것이었으니, 왜 이창동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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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타는 태풍을 기다리고 있지.

왜냐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한때 지붕을 송두리째 앗아가곤 했던 태풍은

무슨 일이든 기어코 벌여놓고야 말 것이니까.


강력한 태풍이 예보되던 날, 료타가 일을 꾸미는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관계를 되돌릴 수 있을까.

나 역시 그것이 궁금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어.


하지만 이 영화는 단호했지.

그럴 수 없다고, 아무것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어.


그래서 더 아름다웠는지도 모르겠다.

태풍의 한 가운데서, 위태로운 (전)부부가 위태로운 방식으로 태풍을 피해

서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은.

그 위태로움 가운데서, 완전히 끝났다고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쿄코에게,

료타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알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뿐이었겠지.

료타도 사실 알고 있었던 거야.

위태로운 건 둘의 사이였을 뿐, 

태풍은 처음부터 전혀 위태롭지 않았다는 걸.

놀이터의 미끄럼틀은 너무나 평화롭다는 걸.


맞아. 태풍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겠지. 태풍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겠지.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이미 끝나 있으니까.

빌라에 살면서 더이상 태풍 때문에 지붕이 날아갈 걱정 따위는 안해도 되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태풍이 지나간뒤', 료타는 쿄코와 싱고를 보며

그렇게 기분좋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태풍 따위는 잊어버렸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의 만남을 기약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사실 난 궁금했어.

나도 다 아는데. 아니 알고 있었는데.

나는 왜 료타처럼 웃지 못할까.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것만 같은 이 영화는 왜 나에게 위안을 주지 못할까.



그래서 생각했어. 

여전히 나는 미련하구나.

그래서 슬펐는데, 또 어느샌가 복권이 떠올랐어. 보잘 것 없었던,

격렬한 태풍 한가운데서 흔들리던 복권,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주섬주섬 주워 모을 수 있었던 복권. 


그러니까 사실 료타가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끝남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미래의 몫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끝나 버린 이 영화에서,

여전히 복권과 싱고는, 미래의 몫으로 남겨져 있어.

복권은 당첨되지 않을 것이 뻔하지만, 그럼에도 그 탈락은 미래의 몫이니까.

홈런보다는 포볼이 좋은,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어린 싱고 역시

여전히 미래에 속해 있으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모든 끝난 것을 받아들이는 그 자리에서,

사실은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버지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듯이, 그 시작은 이전의 끝을 반복하는 것일 수는 없겠지만,

공무원이 되고 싶은 료타와 아들 싱고가 서로 다르지만 닮아 있듯이,

유통기한이 지난 소설가의 소설책과 벼루가 서로 묘하게 닮아 있듯이,


그것이 오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복권이 당첨되지 않는다고,

싱고는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없다고

그 아무것도 사실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태풍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모든 상황을 바꿔줄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믿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이제 알겠다.

이미 오래전에 태풍은 지나갔다는 것을.

이제 나도 미련 없는 미소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복권은 탈락되지 않았지.

대기만성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료타는 계속 소설을 쓸 테고,

싱고는 야구를 계속 하겠지.


그러니까 료타는 미소를 지었을 수도 있어.


태풍이 지나간뒤,

태풍이 지나갔음에도.



내가 너무 보고 싶은 대로만 영화를 본건가. 

그럼 이건 어떨지. 


멋진 글을 보고, 니가 '니 글도 좋아'라고 말했을 때 매우 부끄러웠어.

나는 한번도 그런 멋진 글을 써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리 태풍이 지나가도, 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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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전성욱은 "정치적 긴급함이 전술의 안이함에 대한 변명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지만, 중요한 것은 '안이함'에 있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정말 유용한 '전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작가도 아마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실 '전술'을 논하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목적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이 '목적'에 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그 목적은 다양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떠한 게임도 따라오지 못할 거대한 오픈월드다. 누가 섣불리 '전술'을, '목적'을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안이함이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여성의 삶을 그렇게 사회적인 통념으로 상투화하는 것"이 '반여성적'이라고 말하지만, 이 책은(작가는, 출판사는) <상투화>를 통해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시에 누군가는 충분한 싸움의 동력을 얻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소설의 통계(와 각주)에서 확인된다. 이 책의 상투성은 플롯이 아니라, 통계에서 나온다. 작가는 철저하게 '통계'에 의해 플롯을 구성해나간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미적으로 형상화하거나, 혹은 남들을(남자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란을 일으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은 '소설'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이해'나 '타협'은 더군다나 아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어색한/불편한 것은 바로 그 통계(와 각주)였지만, 어차피 이 소설은 '소설'을 목표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소설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 목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는 인터넷 공간에서 무수한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생략해도 좋다. 


마지막으로 굳이 '소설'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이 소설은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주며, 동시에 아마추어리즘이야말로 소설이, 왜 소설인지 보여준다. 


다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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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진 "이럴 거면 범인 잡아서 뭐해요?"

황시목 "범인은 잡는겁니다. 잡아서 뭘 어떻게 하는게 아니구요."


그러니까, 감정이라고는 없는 황시목(조승우)은, 법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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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복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인데, 어딘지 모르게 보수성이 느껴졌다. 감독 켄 로치에 대해 검색을 해 본 후, 영화의 많은 부분이 설명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36년생, 꾸준히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좌파영화, 다큐멘터리 기법 등등. 그러니까 영화에 다소 많이 꼰대 같은 면이 있다고 해도, 그렇다면야 그럴 수도 있지, 정도의 느낌.


영화에서 묘사된 지독한 관료주의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이는 내가 지나치게 관료적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한국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관료주의보다 훨씬 더 두렵게 느껴졌던 것은, 관료주의의 끝에 '경찰'의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경찰아저씨가 온다고 협박하듯, 공무원들은 해결할 수 없는 민원인들의 항의에 항상 '경찰'로 대응한다. 더 놀라운 것은 민원인들이 '경찰'이라는 언급에 실제로 무척 겁을 먹는다는 사실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시위를 한 후, 경찰서에서 지나칠 정도로 쫄아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모습은, 정말로 공포스러웠다.


영국에서 (적어도 영화에 의하면) 법은 주먹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으며, 먼 주먹보다 가까운 법이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중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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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읽었었는데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면 다 잊어버려야 맞을텐데, 읽어 나가면서 끊임없이 내가 읽은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뒤의 내용은 한 글자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읽고 나면 반드시 내가 읽었던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금 인간의 기억이란 것이, 아니 나의 기억이라는 것이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실망할 구석이라고는 없으므로, 그냥 이상하기만 했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분위기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궁금했다. 

너무나 일상적인 상황인데, 서술자인 남편의 목소리는, 그리고 서술대상인 아내의 모습은 무서워보일만큼 어두웠고, 불안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한강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소설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언어 자체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했다. 


한가지 더. 그녀에 대한 서술자(남편)의 뜨악한 시선과 그녀의 꿈이 교차로 서술되는 것은, 소설은 과연 누구에게 말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새삼스럽게 상기시켰다. 


한편, 그녀의 원초적 기억에 '개고기'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어딘가 모르게 미심쩍은 느낌을 주었다. 이 소설이 멘부커상을 받은 이상 더더욱. 과연 돼지고기나 소고기였어도 이 소설은 멘부커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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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뇌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 제레미 레너, 에이미 아담스.


외계인이 나타났다. 여기까지는 흔한.. 상황이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영화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그들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에만 집중해 왔다. 그래서일 것이다. <컨택트>의 주인공이 전쟁의 산스크리트어 어원을 '다툼'으로 보지 않은 것은. 원하는 것이 암소든 혹은 다른 것이든, 그것을 알면 전쟁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암소를 원하니까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나도 더 많은 빵을 원하지만, 전쟁을 하고픈 생각은 없다. 당신 역시 그럴 것이다. 나눔으로써 더 풍요로워진다는 식상한 말이 아니라 소유의 문제는 언제나 분배의 문제를 수반한다는 뜻이고, 분할은 곧 분배(divide)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나눔에서 시작되므로, 이 영화가 이제 언어 자체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특히나 이 영화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언어결정론을 전제한다. 언어결정론은 그다지 신뢰할 바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언어적 동물이라는 명제 자체는 무한히 신뢰할 만하므로 그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형성에서 벗어난 외계인의 표음문자, 시제가 없으며, 특히 '원'으로 이루어지는 그 순환적 문자를 배우면 미래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영화적 상상력은 무척 흥미로운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해지는 이러한 순환성은 영화라는 독특한 재현장치와 만나 흥미로운 반전을 이룬다. 딸을 잃은 이후의 루이스가 훨씬 늙었을텐데, 영화에서는 딸을 낳기도 훨씬 전, 외계인을 만난 루이스의 모습이 더 피곤해보이게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낚시질 치고는 다소 치사한 셈인데, 재미있는 낚시질이었으므로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아니, 서사의 시간을 뒤섞어놓는 이러한 기법은 가히 <메멘토>와 비교될 만하다고 생각되었으며, 이와 관련해서 영화 <컨택트>는 원작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의 서사전략을 훌쩍 뛰어넘어, 영화로서의 독자적인 의미를 갖는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문제는 영화의 핵심적인 감정선에 해당될텐데, 단순히 반전의 소재로만 이용된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데, 남편이 무심히 묻는 한 마디, "아이를 갖고 싶어?"에 주인공은 반드시 대답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모든 인물들은 미리 예언된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는데, 이 평범한 주인공이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그 고통을 감당하고, 담담히 감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결국 아이를 낳고, 매 순간 아이의 죽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운명에 대한 이 초월적 숭고함을 영화는 잘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한편, 매우 불편했던 것은 전쟁을 주도하는 국가가 중국과 러시아라는 점이었다. 테드 창 원작 소설에서 국제정치의 맥락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헐리우드의 저열한 책략임이 분명하다. 끝까지 대화를 시도하는 '미국인 언어학자'와 당장 무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중국 지도자 '샹'의 대비는 다소 촌스러웠고, 어떤 점에서는 조금 불쾌했다. '표음' 문자이면서 시제가 없는 문자인 '한자'의 존재를 영화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촌스러움은 불쾌로 바뀌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소통의 윤리가 핵심인 영화로서 취할 태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영화적 흥미로움이 그런 불편함을 계속 가려주어서 더욱 난감했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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