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미는 리틀헝거와 그레이트헝거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실 아무 의미도 없고, 영화에서도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오직 헝거와 리치, 그리고 고양이만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등장시키는데, 일러(고양이), 혜미, 벤은 모두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혹은 어디에도 없는(상상 속에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슈뢰딩거적 존재이다. 


이처럼 혜미와 벤이 강렬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촌스러운 계급 영화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혜미를 아무말 없이 포르쉐에 태우는 종수의 존재를 그냥 바라보기 어려운 나로써는, 동시에 계급 갈등으로 보지 않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진실을 찾아 헤매는 유일한(그리고 너무 진지한) 존재인 종수는 결국 자신이 찾은 진실의 끝에서, 모든 것을 불태운다.


하지만 벤을 불태우고 옷을 벗어버리는 종수는, 대마초를 핀 상태로 불타는 노을 앞에서 옷을 벗어버리는 혜미와 정확히 같은 존재인 것은 아닌가? 그 허망한 춤과 시간은 종수의 그것과 오버랩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버닝이 최서해의 신경향파 소설에서 벗어나 더 나아가는 지점은 벤과 혜미, 그리고 종수를 몇 겹으로 중첩시켜놓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허무한 불꽃(노을)은, 다시 말해 벤의 대마초로 혜미가 불꽃의 춤을 추고,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던 라이터로 벤의 포르쉐를 태우던, 밖으로부터 내부로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그 강렬한 불꽃은, 일찍이 이창동 영화에서 잘 볼 수 없던 것이었으니, 여전히 이창동은 매력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젠더 감수성에 대한 이창동의 (무)의식적인 둔감함은, 외부자인 내가 보기에도 사실 조금 불편한 것이었으니, 왜 이창동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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