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가 보이는 곳에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이렇게도 변한 영도와, 광안리, 해운대가 보이는 곳에,

지긋지긋한 부산에.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애를 써볼 수도 있었을걸. 

 

이럴 줄 알았는데, 

그런데도 참으로 불쌍하고, 안쓰럽구나. 

 

산다는 건, 죽음을 향한다는 건,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구나. 

 

애 많이 썼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

1. 사랑의 상실: “모든 슬픔은 의지였다

 

이규리의 다섯 번째 시집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의 제목은 매혹적이다. 그리고 단순히 매혹적일 뿐만 아니라 이 시집의 핵심적 메시지에 대한 많은 단서를 담고 있다. 먼저 혹은 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 그리고 연인이 아니라 많은 연인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필요한가가 아니라 필요했을까라는 과거형 시제.

시인은 모든 관계를 지나온 지금, 상실과 고독의 자리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로 했던 많은 연인’, 그리고 그것의 필요와 부재는 낭만적 실패나 정서적 결핍의 징후는 아니다. 그것은 상실의 슬픔을 바탕으로 타자를 인식하고 부재를 응시하며 현재를 견디게 하는 힘이나 의지가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많은 연인을, 죽음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어떻게 부재의 상황에서 함께 존재하며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

 

먼저 많은 연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 지붕에 악기들이 걸려 있었어

첼로를 보여주세요

여러 번 말을 했는데

그때마다 주인은 다른 걸 내려주었지

 

눈사람처럼 녹아버릴 거라고

 

첼로를 보러 다시 갔을 때

그 집 사라지고 없었지

 

무언가를 품겠다고 허무 연습을 하던 날의 수

 

등뒤에서 두 팔을 벌려 안아주면

소리가 온다고 믿었으므로

 

소리는 허공인데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먹먹한 날, 구름은 멀리 있는 제 이름과

여러 번 헤어진다고 했다

 

사랑은 원래 타인의 것이니까

 

구름 악기들을 이끌고 돌아올 때

그들은 생애 처음인 듯 맘껏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스트링 스프링 스티어링

링 링 링

 

마지막 노래는 제가 들을 수 없는 노래

사라지며 살아지는 방식은 가엾고

 

손바닥 위에 앉은 눈송이는

따뜻함을 느끼며 죽어간다

 

그 친절한 난간들

 

생각하면 모든 슬픔은 의지였다

구름 악기전문

 

표제작인 구름 악기에서 화자는 첼로를 사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화자가 얻어 낸 것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는 구름 악기였으며, 구름 악기는 허공에 불협화음을 울릴 뿐이었다. 이처럼 이 시는 사랑을 구름 악기에 비유하면서, 사랑의 특성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첫째, 내가 찾는 사랑은 없다는 것, 미끄러지며 계속되는 상실의 과정이 곧 사랑이라는 것. 화자는 첼로를 보여주세요라고 여러 번 말하지만, “그때마다 주인은 다른 걸 내려준다. 그래서 악기 혹은 사랑은 언제나 생애 처음인것만 같은, 그러나 늘 반복되는 불협화음이다. 결국 화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작정하고 첼로를 보러 다시 갔을 때 / 그 집 사라지고 없었.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지금 이 시점에서 첼로를, 연인을 찾을 기회는 없다.

화자가 연인을 찾아 헤맨 이유는 등뒤에서 두 팔을 벌려 안아주면 소리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소리는 허공인 것을. 이것이 둘째이다. 사랑은 상실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실체조차 없다. 사랑은 첼로가 아니라, 악기도 아니라, 구름이다. 관념 속에서 구름은 타고 다닐 수 있을 것처럼 단단하지만, 실제 구름은 미세한 수분과 얼음 입자여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과정은 매번 결핍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단단해 보이는 사랑은, 늘 구름처럼 흩어진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셋째, 이러한 사랑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 잡을 수 없는 사랑과 그것의 필연적 상실은 이 시에서 죽음으로 비유된다. 구름의 결정체인 눈송이가 따뜻함을 느끼며 죽어가듯이, 이별은 곧 연인의 죽음과도 같다(다음의 시에서도, 사람이 물건처럼 하나둘 없어진다 (...) 휴대폰에 남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찾으러 / 플랫폼을 헤매다가, 카디건. 혹은 다음의 문장에서도, 한 사람을 기억하라면, 죽은 사람이야, 수희). 블랑쇼는 죽음이 주체 바깥에 있는 사건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하지만 타자의 죽음은 지워지지 않는 현존으론 남아 우리에게 경험된다. 타자의 죽음은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결코 완료되지 않는, 끝나지 않는 끝이다.

이 시의 화자 역시 말한다. 우리의 모든 삶은 사라지며 살아지는 방식이라고. 우리의 삶에서 많은연인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시집에서 숱하게 반복되는 죽음의 이미지가 증명하듯 이별과 부재는 죽음을 연상시키며, 상실의 과정인 삶 그 자체를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노래제가 들을 수 없는 노래이다. 첼로는, 악기는, 구름은, 노래는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만큼만 연주된다. 그리고 조금씩 주변의 것들이 사라지며 매 순간 부재를 확인하게 되는 현재의 삶은 결핍과 허무만이 남은 슬픔이다. 이처럼 많은 연인의 존재는 낭만적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삶에서 겪는 필연적인 상실과 그로 인한 부재의 상황을 강조한다. ‘많은 연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국 이 순간 홀로라는 것, 결핍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슬픔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실의 경험은 주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해체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사랑은 부재하고, 우리는 외롭고, 삶은 허무한데.

 

이제 필요했을까라는 과거형 시제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사실 구름 악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모든 슬픔은 의지였다”.

 

 

2. 과거와 미래 사이, 부재의 틈에서

 

죽은 새를 손에 들고

어떻게 할까?

새는, 그 새는부분

 

많은 연인이 죽음과도 같은 상실과 부재, 결핍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 이제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할까?”. 까뮈에 의하면 부조리는 본질적으로 죽음에서 온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다시금 원하지 않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떤다.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실존적인 인간은 죽음을 응시한 채, 삶의 거대한 공허와 공포를 눈앞에 두고, 의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부조리를 응시할 수 있는 의지. 하지만 이 시집에서는 의지가 슬픔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죽음은 타자의 영역이고, 시인은 부재하는 현존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몽골의 톨강에서 배가 뒤집혀 죽음처럼 떠내려가고 있을 때,

 

왜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는 거라 생각했을까

경로부분

 

위 시에서는 배 사고를 당한 화자가 죽음처럼 떠내려가는 순간, 문득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는거라는 생각을 한다. 주체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사건, 즉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화자는 미래의 다른 만남을 생각하는 것일까. 죽음과 만남이 중첩되어 있는 이 묘한 사고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필요했을까라는 과거형 시제를 떠올려볼 수 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있다. 연인은, 그리움과 사랑은 온전히 과거에 속한다. 다시 만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을 상실한 현재는 부재와 결핍의 시간이다. 그리고 죽음은 나의 모든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미래의 사건이다. 죽음은 결코 현재가 될 수 없는 한계점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상실된 과거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미래 사이에 불완전하게 끼어있는 틈이다. 이 시집에서 부재와 슬픔은 이러한 틈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배가 뒤집힌 톨강에서의 사고는 화자에게 죽음과도 같았고, 그 죽음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미래에서야 완수될 어떤 만남(“먼저 가서 기다리는 거”)을 연상시킨다. 불완전했던 현재의 틈은 과거의 그리움과 미래의 만남을 연결시키는 접촉점이 된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 타자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연결하는 현재에 대해 이 시집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벽시계를 사러 갔는데 시계마다 시간이 달랐다 (...) 이거 미래인가

다시 살고 싶은 시간이 돌아오는가

 

시계를 걸자

스노볼처럼 내 방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맞지 당신이지?

 

그땐 해가 길었는데 시간이 많았는데 밍밍한 토마토를 따서 먹고 어린 생가지를 먹고 이유가 필요할 땐 당신을 불러도 좋았는데 웃음이 웃음을 전염시켰는데 (...)

 

우리는 미래를 걸어두려 텅 빈 겨울을 찾았던 것일까

슬픔이 웃음을 받치고 있었는데

웃음부분

 

웃음에서 화자는 당신을 떠올리며, “해가 길었던 그때, “웃음이 웃음을 전염시켰던 그때, “당신을 불러도 좋았었던 그때를 생각한다. 그렇게 부재한 과거의 시간을 생생하게 느낀다. 왜냐하면 화자가 벽시계를 사러 갔기 때문이다. 그 가게에서는 시계마다 시간이 달라서 과거의 웃음을, 시간을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과거로 돌아가겠는가. 따라서 웃음의 시간은 다시 살고 싶은 시간이지만, 동시에 미래에서만 실현 가능한 시간이다. 당신이 존재하는 것은 과거의 그때이고, 우리가 다시 재회할 수 있는 시간은 미래, “미래를 걸어둔 텅 빈 겨울이다. 이렇게 슬픔이 웃음을 받치고 있, 슬픔으로 가득 찬 현재는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틈이다. 미래가 도래하기 전까지 불완전하므로 슬프고, 고통스럽다.(고통을 무늬라 말하도록 / 전정은 전생 무렵 같은 장면을 준다 또 준다, 도미노)

하지만 고통뿐일까. 현재가 틈이라면,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통해 비로소 연결되고, 완수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토마토가 붉어가는 속도로 너는 늙고 있다 (...)

유서를 쓰려고 해 간결한 유서 ()

햇빛이 요긴한 어느 날

너와 각별했던 다른 네가 볕 아래 앉아 유서처럼 흐른다

유머부분

 

유머에서 화자는 지금 만날 수 없는 각별했던너를 생각한다. 너는 토마토가 붉어가는 속도로늙고 있다. 하지만 토마토가 붉어가는 것은 익어 가는 것이고, 비로소 그 가치를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고,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시인은 미래의 죽음 앞에서 과거의 너를 기억하며 유서를 씀으로써, 죽음을 통해 다시 너와 만날 준비를 한다. 그러므로 현재는 익어가는 시간이다. 과거에 속한 너를 미래의 죽음으로 예비하는 시간이다.

부재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현존, 이것을 숨바꼭질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보이지 않는 건 부재인가 (...)

존재와 부재는 숨바꼭질의 범위 (...)

숨은 곳을 버리면

숨을 곳이 확장될지도 몰라 (...)

나는 당신과 함께 살 수 있어

그리고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어

숨바꼭질에서 들키는 법부분

 

위 시에서 화자는 숨바꼭질의 본질을 탐구한다. 숨바꼭질은 자신을 숨기는 것이 목적인 놀이이고,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게 함께 있는 형식을 갖는다. 함께 시작하지만 누군가는 곧 부재하게 되고, 하지만 숨바꼭질이 성공적으로 완수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숨은 사람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삶 전체로 확장된다(숨은 곳을 버리면 / 숨을 곳이 확장될지도 몰라).

화자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라는 낭만적인 말을 당신 없이도 살 수 있어라고 뒤집는다. 왜냐하면 삶이 숨바꼭질 놀이라면 당신의 부재는 곧 당신과 함께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곧 당신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에(그것이 죽음이라는 사건과 함께 할 지라도). 부재한 당신과 함께 있다는 이 역설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틈에서 연결한다. 그것이 이 시집에서 연인을 온전히 과거의 영역에 남겨두었음에도, 부재와 결핍을 슬픔의 의지로 견뎌낼 수 있는 까닭이다.

 

 

3. 오해의 언어와 소통의 윤리

 

슬픔의 의지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언어와 관련하여 잠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말이 있다. 죽음이 타자와 나를 잇듯이, 현재가 과거와 미래를 잇듯이, 언어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의 목도리처럼 휘날리는 슬픔에 다가가 말을 걸면

 

거기 누군가 울고 있다 (...)

 

목은 온도라는 길이가 필요한데 (...)

온도부분

 

온도에서 시인은 특이하게도 어린 왕자와 슬픔, 그리고 의 이미지를 겹쳐놓고 있다. 시인에 따르자면 은 너무 가늘어서 가여운 슬픔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슬픈 이유는 손목, 발목, 길목 등 목이 이것과 저것을 잇는숙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은 목소리의 통로로서, 우리의 마음과 말, 그리고 나와 타자를 잇는다. 목은 말씀을 전하려고”, 목을 내놓는다. 그런데 여기에 왜 어린 왕자가 등장할까. 말을 전하는 목에서 왜 어린 왕자의 목도리처럼 슬픔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어린 왕자󰡕에 등장했던 사막여우의 말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넌 아무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사막여우는 말이 오해의 근원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는 비단 사막여우의 생각만은 아니다.

 

설명이 안 되는 파두,

오해는 설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설명 때문이지 (...)

 

대답 대신 파두를 들었다

슬픔에는 겸손한 힘이 나와 (...)

 

슬픔으로 세계는 아픈 풍경을 덮는다 덮어준다

파두부분

 

시인 역시 오해는 설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설명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두라는 멜로디는 오해를 낳는 말 대신, 슬픔을 낳는다. 언어, 설명이 오해의 근원인 까닭은 언어가 구름 악기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상실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막에 자욱한 질문들이 있다고 말하며 사막을 은폐와 은유의 본적이라고 표현한다(섭씨 48). 은유는 언어의 미끄러짐을 통해 의미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언어는 자의적이어서, 고정되지 않은 의미의 연쇄를 통해 기존의 의미를 상실한다. 따라서 벤야민이 말한 바, ‘언어는 소통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소통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여기서 언어는 죽음의 부조리를 떠올리게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부조리의 근본적 조건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인 인간의 숙명 또한 부조리하다. 오해만을 낳는 언어 외에 다른 소통 수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를 써야 하는 숙명을 지닌 시인에게 슬픔이 한 꺼풀 더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온전히 가닿을 수 없는 사랑, ‘많은 연인처럼, 언어 또한 타자에게 온전히 가닿을 수 없다는 점은 시인에게는 이중의 부재와 슬픔을 안겨 준다. 하지만 파두에서 화자는 정확히 그 슬픔의 지점에서 겸손한 힘이 나온다고, 슬픔으로 아픈 풍경을 덮어 준다고 말했다. 죽음을 응시하기 위해, 실존이 되기 위해, 시를 쓰기 위해, 다시금 슬픔의 의지가 없을 수 없다.

 

손으로 쓸어보면 차고 거친 실존들이

사방을 싸고 있을 때

 

시를 썼지

함께 운 적 없지만 울고 있었지부분

 

 

4. 우리: “이것이 슬픔일 리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시집에서 가장 처음 만날 수 있었던 단어, ‘우리이다.

 

목적어였던 당신과 세계를

주어와 술어로 바꾸자

 

목적어가 계단을 거둬가버렸다

위안부분

 

당신이나 세계는 흔한 목적어이다. 당신을, 그리고 세계를, 사랑한다. 증오한다. 좋아한다. 밀어낸다. 떠올린다. 그리워한다. 그러니까 당신이나 세계는 아주 유용한 목적어여서, 어떤 술어로든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의 말처럼 목적어였던 당신과 세계를 주어와 술어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당신은 세계이다. 이제 당신과 세계는 그 자리에 각각 고정되어서,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계단을 거둬가버렸다”). ‘당신은 세계이다라는 명제 혹은 당신이 아니면 세계가 아니다는 대우명제만이 참이므로, 이 세계에서 당신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 된다. 어떤 목적어도 끼어들 수 없는 세계.

당신이 목적어가 아닌, 즉 욕망의 대상이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임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일인칭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타자의 죽음은 나를 지우고 타자를 맞이하는 비인칭적 사건이듯이, 숱한 상실과 죽음을 지켜본 시인이, 어찌 나를 나로서만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 세계에서 어찌 당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외줄의 연대가 // 일인칭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

약함으로 약함을 해석하며 / 수 세기를 건너오는 // 여태 이 강렬한 초록은

일인칭부분

 

거기 누구 있습니까 // 뒤가 되어준 예의에게 / 뒤가 되어간 선의에게

101부분

 

잊지 않을게 / 조용히 있을게 / 이게 위로가 되겠니 // 이 슬픔을 평가절하하지 말아줘

옥루에선 아직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은하는 벌써 한 바퀴를 돌았다부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에게, 당신이 곧 세계인 시인에게, 절대적 단절과 상실을 마주한 시인에게, ‘우리가 되는 윤리적 사건이 우연일 리 없다. 타자라는 슬픔이 외면될 리 없다. 이제 이 시집의 마지막 시, “슬픔일 리 없는 슬픔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시 본래면목을 보면, 도대체 우리에게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는지 알게 된다.

 

삼백오십 년이 누웠다

폭풍우 뒤 보호수가,

 

할말은 그동안 다 했다는 듯 돌아갔다 (...)

 

나무가 누울 때 낮은 풀들이 조금조금 자리를 내주었다

옆이 있었다

 

우리는 다 잃어버린 게 아니야

 

아름다운 세계는 예기치 않게 온다 (...)

 

이것이 슬픔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

얼핏 오래전 한 사람의 자리처럼

본래면목부분

 

삼백오십 년이나 살았던 보호수가 누웠다. 영원과도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화자는 더 이상 이것이 슬픔일 리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보호수의 죽음은 얼핏 오래전 한 사람의 자리처럼과거의 모든 죽음을 소환했고, 그 곁을 작은 등불을 건 벌들이 하염없이날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불완전하게 끼어있는 것이 아니라, 부재와 결핍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것을 매개하면서, 그것과 함께,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 잃어버린 게 아니야”.

현재는 그 과거들을, 죽음들을, 많은 연인들을 거쳐 왔으며, 그것을 애도하며 지켜 왔으므로 언제든 예기치 않게” “아름다운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꿈꾸며 현재는 토마토처럼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많은 오해를 낳았어도 할말은 그동안 다 했, 언제나 우리에게는 조금조금 자리를 내주, “옆이 있으며, 그렇게 우리는 많은 과거와, 죽음과, 연인들이 필요했다.

 

결국 우리에게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상실과 결핍의 고통을 끌어안는 슬픔의 의지를 통해 미래의 시간을 준비하고, 부재할지라도 혹은 부재를 통해 서로의 옆이 되어주는, 주변을 지켜주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여기에 함께, 우리로 와 있다. 우리가 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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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속에. 그리움은 시효가 기니까. 

어쩌면 내가 움직이는 한 영원히 달라붙겠지. 끈적하게. 나는 팔 한쪽을 알아이아이에게 떼어준 걸 후회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모하게 폭풍을 건넌 내 판단을 후회한다. 나는 이 순간 나를 설명하는 모든 상황을 후회한다.

 

바람 소리에 더 이상 살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두려움마저 소용돌이에 휩쓸려 내 안에서 사라진다. 나는 랑이 존재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 

랑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가 만난 사막에 대해. 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나의 사막에 대해. 그렇게 늙어가는 랑의 곁에서, 조금씩 망가져 가는 내 몸으로 이야기하겠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랑과 시간이 맞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이번에는 너와 함께 늙어갈 수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랑을 떠올리며,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간다. 

간절하게.

 

슬픈 소설을 읽었다. 

로봇이 감정을 갖게 되는 과정이 그다지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감정은 소중하게 여겨졌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사막을 걷고 있다. 

랑이 존재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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