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카테고리 없음 2024. 8. 14. 17:25 |

오랫동안 쓰지 못하고 있다가, 무엇이든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일단 대략적으로만 쓴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영화에서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바로 이 지점이 영화의 정점에 해당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사랑이 어떻게 인간을 붕괴시키는가에 대한 영화이고, 동시에 사랑이 어떻게 그 붕괴를 끊임없이 (그러므로 영원히) 유보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영화이다. 

 

<아가씨>가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과 같이, 이 영화 역시 명확하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붕괴되는(사랑에 빠지는) 해준과, 붕괴가 회복되는(파도치는 바다의 혼돈 가운데에서, 더이상 구두를 신지 않은 해준이 운동화의 신발끈을 다시 묶는 그 지점의) 해준. 

해준은 혼돈 속에서 비로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모든 것이 흩어지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바다 속에서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영화가 불륜을 다룬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인간을 붕괴시키는 강렬한 사랑이라는 것은, 이미 평온한/일상적인(즉 부부와도 같은) 사랑이라는 말과 형용모순되기 때문이다. 

 

해준을 중심으로 한 영화의 서사 구조가 너무나 강렬했으므로, 처음에는 서래가 해준의 사랑, 붕괴, 회복을 돕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력적인 연기에 속기 쉽지만, 살인 흔적을 감추어야 한다는 목적을 지닌 그녀가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계속 드는 의문은 왜 그녀의 할아머지가 광복군으로 설정되었을까 였다. 단순히 한국에 오게 하기 위한 장치일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소 과하게 느껴졌고, 어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잘 이해되지도 않았다. 

 

"그동안 너무 무거웠어요."

 

왜 그녀는 그러한 '무거움'을 해준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전까지, 즉 그를 위해서 스스로 붕괴되겠다고 마음 먹기 전까지, 계속해서 간직해야만 했던 것일까.

 

하지만 영화를 두 번째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는 진정으로 해준이 아니라, 서래의 붕괴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도한 미장센을 사용하여 산과 바다를 대립적으로 상징화하는 것의 의미도. 

 

서래의 할아버지는 산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서래의 어머니는 한국에 서래의 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 산에 관한 책과 할아버지의 유골을 품에 안고 서래는 한국을 찾는다. 즉 서래는 중국인이(한국인도) 아니다. "한국말을 잘 못해" 마침내 중국인처럼 보이는 서래에게 할아버지의 산은 궁극적인 정착지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착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다를 좋아하는 서래는 고소공포증이 있을 뿐더러, 한국에는 등산을 즐겨하는 기도수와 같은 인간들이 산을 선점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서래는 산을 되찾기 위해, 정착하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결국 그녀는 산에 무거운 짐을 버리고, 유동적이고 무의미한, 모든 것이 흩어지는 바다로 돌아간다. 붕괴되어, 영원히 해준과 헤어지지 않을 결심을 하고, 해준의 영원한 미제 사건이 되고, 결국 그렇게 해준과 헤어지지 않게 된다.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었떤 그녀는 산과 바다에 끼인 존재론적 조건을 지녔다. 살인사건의 해결이라는 구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목숨과도 같은 문제였을 것이다. 시체와도 같은 몸으로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 오면서도, 끝까지 산에 대한 책과 할아버지의 유골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서래가 '산'(정착)을 버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그것을 완성(정확히 말하자면 유보)하기 위해 서래는 비로소 자신이 있던 그곳, 바다로 돌아간다. 

모든 것을 붕괴시키면서, 영원한 혼돈 속에서 우리를 놓아 주지 않는 그곳, 바다로. 다시 말해, 사랑 그 자체로. 

 

* 그녀는 말한다. "헤어질 결심을 하려구요."

  이는 그녀가 영원히 사랑 속에 있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금연으로 비유하자면, 금연이란 완성될 수 없듯이, 다시 말해 금연은 담배 피는 것이 유보되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담배를 피지 않을 결심이다. 헤어질 결심은 결코 헤어짐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고, 헤어짐은 완수되지 못할 것이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

나는 다른 사이트보다 저렴하다는 점에서 평소 티몬 쇼핑몰을 자주 이용해 왔다. 

그런데 얼마 전, 슈카월드에서 티몬 쇼핑몰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할인율이 비상식적으로 높은 상품권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돌려막기를 연상시키는 이것은, 일반적으로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암시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나는 홀린 듯이 티몬에서, 그것도 내가 주문할 일이 별로 없는 상당히 고가의 상품을 주문하고 있었다. 

 

결국 문제가 터졌고, 거짓말처럼 판매자측으로부터 상품 취소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예상대로 티몬으로부터 카드 취소가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티몬은 카드 취소가 불가하므로 현금으로 환불하겠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을 했는데, 아무런 사유 없이 카드 취소가 불가할 정도면 현금으로 환불하겠다는 것은 당연히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포털에서 티몬 환불과 관련된 글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자주 틀리는 예상을 해본다면, 이 티몬 사태는 소수의 사람들이 손해를 본 단순한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어느 누구도 적다고 생각하지 않을 금액을 심적으로 포기하고 난 후, 비싼 경험을 했다고 치기엔 그다지 의미 없는 경험이었으므로, 다만 다음 두 가지 점을 느꼈다. 

 

첫째, 코로나 이후 많은 이들이 경제에 거품이 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거품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주식이나 부동산의 호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이 티몬 사태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즉 이 티몬 사태가 거품이 꺼지는 혹은 경기 침체나 위기로 가는 하나의 길목이라면,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나의 어리석은 판단이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정확히 그 가운데에서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은 그다지 아깝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역사적 의미라면.

하지만 사실 티몬 사태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은 두 번째 이유와도 관련되는 것인데, 그것은 신용(카드)에 대한 나의  믿음과 관련된 문제이다. 

 

둘째, 따라서 이것이 더욱더 본질적인 것으로, 자본주의가 믿음의 신화라고 하는 상식적인 격언을, 그래서 머리로만 알고 있던 진리를 드디어 비로소 몸소 깨우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용카드를 지탱하는 것은 바로 신용 그 자체, 즉 믿음뿐이라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쇼핑몰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한 상품을, 상품을 받지 못해 환불 절차가 완료되었음에도, 황당하게도 카드 취소는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을 줄 나는 이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다.

티몬이 위험하다는 슈카의 경고에도 내가 홀린 듯 과감한 결정을 한 것도, 사실은 그냥 홀린 것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자본에 대한, 신용에 대한, 신용 카드에 대한, 그리고 쇼핑몰이 지탱하는 경제 시스템에 대한 너무나도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근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선입금한 것도 아니고, 대형쇼핑몰에서 카드로 결제하고 물건을 받지 못했는데 카드 취소가 불가하다고? 이전까지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용카드 혹은 자본의 흐름에 대한 신앙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견고한 시스템이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보이지 않는 허약한, 자본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만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EBS에서 여러 번 본 내용임에도, 이제서야 그것을 알았다. 

은행에 돈을 맡겼을 때, 우리집 금고에 있을 때보다도 그것이 오히려 더욱 안전하다고 나는 믿어 왔다. 

하지만 내가 맡긴 돈은 이미 은행에 없다. 더 많은 이자를 받고 누군가에게 대출되고 난 후이다. 내가 돈을 찾을 때, 그것은 내가 맡긴 돈이 아니라, 나 이후에 다른 사람이 은행에 맡긴 돈일 뿐이다. 즉 자본의 심장인 은행의 시스템은 폰지, 돌려막기와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핵심은 믿음이다. 그 어떤 정책적 뒷받침이 아니라. 

그러니까 철두철미한 정책적 보완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본에 대한, 신용에 대한 믿음이 깨진 순간 뱅크런은 일어나게 된다. 언젠가 믿음이 깨지면, 그 돈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티몬 쇼핑몰이 소비자의 돈과 판매자에게 지급되어야 할 돈으로 (아마도) 돌려막기 폰지 놀음을 했던 것처럼, 티몬 쇼핑몰이나 은행은 본질적으로 구조가 같고, 그것이 견고하다는 사람들의 믿음 외에 그것을 지탱하는 그 어떤 견고한 시스템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자본주의는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허약하다는 것을, 믿음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은 꽤 값비싼 깨달음 혹은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경험이 아니라 그저 수업료였다. 

결론은 없고, 자본주의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그것에서 여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저 머리로만 알았던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24. 7. 25.)

Posted by 문학콘서트
:

너의 이름은

카테고리 없음 2018. 7. 20. 13:42 |

'이름 없음'에 대하여 다시 적어 둔다. 


꿈 속에서 서로의 몸이 뒤바뀐채 만났던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서로 속해 있는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이란 것이 원래 그렇듯, 서로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이 기적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그 시간에

타키는 서로의 존재(이름)를 잊지 않기 위해 각자의 손에 이름을 적어 두자고 한다. 


그러나 정작 타키가 미츠하의 손에 적은 것은 이름이 아니라,

'스키다'였을 뿐. 


이런 수줍은 고백은, 단순히 낭만적인 이들의 감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언제부턴가 그런 기분에 휩싸여 지낸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계속 누군가를 찾고 있었어."



우리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러나 그 목적어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키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좋아한다'는 고백만을 미츠하의 손에 남긴 이유다. 


목적어가 존재하지 않는 감정.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배웠던 사랑의 본질이 아닌가.)


그 결핍을, 

영화는 판타지를 통해서 

충족시키지만, 


그래서 영화의 판타지가, 식상하지 않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이 시간도 결국 흘러갈 것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