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
카테고리 없음 2013. 9. 15. 09:51 |김솔,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 21세기문학 2013 여름호.
허희라는 젊은이는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는 나에게 한국문학의 범위와 그 자명성에 대해 스스로 되묻도록 추동했다. 어느새 별로 회의하지 않게 되어버린 한국(인)이라는 고정된 틀이 도리어 한국문학을 폐색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다. 어떤 소설에서 한국(인)의 소재를 따지는 담론은 효용이 없다. 그보다 훨씬 더 긴요한 판단은 어떤 소설이 작금의 세계에서 한국(인)의 형세와 입장을 반추하게 하는가를 가늠해 보는 것이 아닐까. 한국(인)이 부재하는 김솔의 작품이 오늘의 한국문학으로서 가능성을 담지할 수 있다는 의견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21세기문학, 2013 가을)고 말했다.
아마 인용하지 않은 앞의 문장을 참조하여 말해본다면, 김솔의 이 소설에서 "한국인의 형세와 입장을 반추하게 하는" 대목은 네덜란드의 합법적인 동성애와 코카인 흡입 장면에 있을 것이다. 나아가 허희는 여기에 "한국(인) 없는 한국문학의 일신 가능성"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낯선 '암스테르담'에서 가라지 세일(중고매매)이 이루어지는 것도 그러한가? 우리의 형세와 입장을 반추하게 하는가? 물론 동성애의 합법 여부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 희미한 소설 속의 일부분이 '가라지 세일'이라는 핵심적 모티프를 돕거나, 혹은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부분의 대목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여기서 우리의 입장을 반추할 수 있겠는가. 혹은 나아가 어떻게 우리 문학을 일신할 수 있겠는가.
"개별적인 양태야 어떠하든지 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보편적이므로 사회, 문화적 코드가 다르다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인간이라는 공통항은 '장면의 현실화'를 구현하고 상호 이해의 지대를 구축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 소설의 핵심적 상호 이해의 지대는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가라지 세일'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듯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들의 이별 과정은, 첫 번째 가라지 세일과 두 번째 가라지 세일 사이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사랑과 이별은 그들의 사물들에 의해 '대신' 정리되고, 그것의 '매매' 자체가 곧 이별의 완수가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암스테르담과 서울을 연결해 주는 것은 사랑 따위가 아니라 자본일 뿐이며, 여기서 우리가 반추해야 하는 것은 동성애의 합법이 아니라, 사랑을 매개하는 물신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