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 21세기문학 2013 여름호.

허희라는 젊은이는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는 나에게 한국문학의 범위와 그 자명성에 대해 스스로 되묻도록 추동했다. 어느새 별로 회의하지 않게 되어버린 한국(인)이라는 고정된 틀이 도리어 한국문학을 폐색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다. 어떤 소설에서 한국(인)의 소재를 따지는 담론은 효용이 없다. 그보다 훨씬 더 긴요한 판단은 어떤 소설이 작금의 세계에서 한국(인)의 형세와 입장을 반추하게 하는가를 가늠해 보는 것이 아닐까. 한국(인)이 부재하는 김솔의 작품이 오늘의 한국문학으로서 가능성을 담지할 수 있다는 의견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21세기문학, 2013 가을)고 말했다.

아마 인용하지 않은 앞의 문장을 참조하여 말해본다면, 김솔의 이 소설에서 "한국인의 형세와 입장을 반추하게 하는" 대목은 네덜란드의 합법적인 동성애와 코카인 흡입 장면에 있을 것이다. 나아가 허희는 여기에 "한국(인) 없는 한국문학의 일신 가능성"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낯선 '암스테르담'에서 가라지 세일(중고매매)이 이루어지는 것도 그러한가? 우리의 형세와 입장을 반추하게 하는가? 물론 동성애의 합법 여부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 희미한 소설 속의 일부분이 '가라지 세일'이라는 핵심적 모티프를 돕거나, 혹은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부분의 대목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여기서 우리의 입장을 반추할 수 있겠는가. 혹은 나아가 어떻게 우리 문학을 일신할 수 있겠는가.

"개별적인 양태야 어떠하든지 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보편적이므로 사회, 문화적 코드가 다르다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인간이라는 공통항은 '장면의 현실화'를 구현하고 상호 이해의 지대를 구축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 소설의 핵심적 상호 이해의 지대는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가라지 세일'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듯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들의 이별 과정은, 첫 번째 가라지 세일과 두 번째 가라지 세일 사이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사랑과 이별은 그들의 사물들에 의해 '대신' 정리되고, 그것의 '매매' 자체가 곧 이별의 완수가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암스테르담과 서울을 연결해 주는 것은 사랑 따위가 아니라 자본일 뿐이며, 여기서 우리가 반추해야 하는 것은 동성애의 합법이 아니라, 사랑을 매개하는 물신뿐일 것이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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