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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야만적인 엘리스씨>

문학콘서트 2014. 1. 28. 17:54

소년 앨리스는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뭐를?

뭐냐면...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기를. 밤과 낮이 뒤집어지기를.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다가 해가 뜨고 해가 저물어서 다시 밤이 되고 해가 뜨고... 날마다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토끼 한 마리가, 앨리스 소년의 발 근처를 휙, 지나갔을 때... (...)

토끼가... 휙 지나갔을 때, 붉은 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늦었다, 늦었어, 하면서 앨리스 소년의 앞을 지나갔을 때, 앨리스 소년은 저거다, 라고 외치고 토끼를 따라 뛰었다. 토끼를 쫓아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토끼굴로 미끄러졌다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 토끼굴이 얼마나 길고 깊은지 아냐? 그건 진정 긴 굴이었다. 앨리스 소년은 떨어지면서 다시 기다렸다.

뭐를?

바닥에 닿기를.

뭘 하려고?

그래야 다른 데 가지. (...)

그래서, 닿았냐.

아직.

아직?

아직도 떨어지고, 여태 떨어지고 있는 거다. (...) 언제고 바닥에 닿겠지, 이제 끝나겠지, 생각하는데도 끝나지 않아서, 이게 안 끝나네, 골똘하게 생각하며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129).

 

만약 '앨리시어(alicier)'가 '앨리스-되기'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견디고(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기를. 밤과 낮이 뒤집어 지기를.

첫째, 왜 우리는 세상이 뒤집히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개새끼들아, 너희는 좆같다, 너무"(142) 좆같기 때문에. 그리하여 동생은 엄마의 '씨발' 모드를 피해 도망가다 공사장의 '모래' 속에 파묻혀 죽기 때문에.

 

둘째, 그렇다면 우리는 떨어지고 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시 다른 선택은 없는가?

이 소설이 안, 밖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앨리스 이야기를 듣던 한 남자는 말한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되지, 라고 말했다. 모든 일은 그 새끼가 나무 아래 서 있기를 고집했기 때문 아닐까? 나무 바깥으로 나가면 상황 끝, 오케이?(158)

 

"하지만 그건 마치 갤럭시와도 같은 대답"(158)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앨리시어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거리에 서 있"으며, "이 거리 어딘가에서 꿈을 꾼다"(160). 바로 여기에서 앨리시어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떨이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떨어지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기록하고, 이야기를 남기고, 다시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앨리시어가 이야기를 들려줄 동생은 없으므로, 이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는 것이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이 설사 소설 나부랭이 같은 것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밤과 낮이 뒤집어지고, 바닥에 닿기를 기다리는 이야기이므로, 듣고, 기록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이것을 어디까지 들었나.

이것을 기록했나. 마침내 여기까지, 기록했나.

앨리시어가 그대를 기다린다.(162)

 

* 이것은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야만적인' 앨리시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즉, 폭력적인 것은 야만적인 것이 아니다. 야만적인 것은 교양이 없고 무례한 것이므로, 그 무엇보다 폭력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야만적인 것은 우리의 내부에 있으면서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더러운 복장으로 우리의 눈을 더럽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