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영화를 보고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제목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의 내면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 흔한 나레이션도 없다. 그렇데 어떻게 '나'는 전설이 될 수가 있는가. 갑자기 제목에서 네빌의 목소리가 뛰쳐나올 필요가 무엇이었겠는가. 나아가 '전설'은 시간의 축적을 전제로 하는 것. '나'가 죽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이미 '전설'이라고 확정('이다')짓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고작해야 "나는 전설이 될 것이다"는 추측만이 가능할 것. 그러니 현지 시점에서, 그것도 '나'가 '전설이(되었)다'고 외치는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워질 밖에.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안나(알리스 브라가)가 "그는 전설이다(This is his legend)"라고 말한 것이야말로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그는 이미 죽었고, 세상을 구할 백신을 남겼으므로 이제서야 그는 전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제목은 역설이나 상징이 아니라 단순한 무지를 나타낸다. 이 기표는 드디어 기의와 작별하고 진정한 자유를 획득했다. 즉,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이므로, 코미디로써의 의미만을 갖는다. 만약 감독(프랜시스 로렌스)이 원작을 정밀하게 분석했다면, 그리고 조금 더 현명한 방식으로 이 영화의 정체성을 드러냈으려면, 이 영화의 제목은 반드시 '그는 전설이다'가 되었어야 한다. 1
이 우스꽝스러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많지 않으므로,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 속도감이 돋보이는 영화의 초반부를 보고, 나는 진정 이 영화가 인간의 고독,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었다. 정확히 개가 죽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은 네빌이 안나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살아있는 인간을 보고 네빌이 느끼는 당혹감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네빌은 더 화내고 더 고독하고 더 간절했어야 한다. 그리고 마네킹이 대신하지 못하는 '인간-과의-관계'를 마주쳤을 때의 당혹감을 더 생생하게 드러냈어야 한다. 그 장면에서 네빌은 단지 조금 어색해했을 뿐이며, 안타깝게도(?) 안나는 그 순간 (감정이 절제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과찬이고,) 그저 마네킹이었을 따름이다. (네빌이 당혹스럽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네킹은 늘 만나오던 것이었으니까)
따라서 이 영화는 인간의 고독을 드러내기에 형편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이 영화를 옹호하자면, 그냥 그것에 무관심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결국 의도했던 것은 마지막 장면으로 수렴되는데,(마지막 장면 스캔하여 넣을 것) (리바이어던 표지) 생존자들이 살아남은 그곳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의 도시국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연일까. 나아가 리바이어던의 표지에 등장하는 국가와 왜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을까. 결국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자연상태'에 관한 영화이다. 법으로 통치되지 않는 성밖에는 '자연상태'의 '늑대인간'들이 사는데, 그들은 법의 포섭을 받지 않으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로 살아간다. 홉스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가 서로의 공격을 두려워하며 "외롭고 초라하며 끔찍하고 짐승 같고 짧은"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야말로 '나는 전설이다'에 등장하는 좀비들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이다. 해결책은 오로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계약'을 맺는 길뿐이다. 그러므로 네빌이 발명했고, 안나가 생존자들의 도시에 갖고 들어서는 백신은 곧 '법'의 다른 이름이다. 두꺼운 성벽 안에서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사제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리바이어던처럼, 그들은 총과 백신을 들고서야 늑대인간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왜 교화되지 못하겠는가. 총과 백신이 있는데. 늑대인간들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아니다. 성밖에 사는 늑대인간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고, 인간이 그들을 죽일지라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좀비'이다. 2
이 부분에서 '좀비'라는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21세기를 휩쓸고 있는 좀비는 그야말로 'Undead'이다. 왜 좀비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가? 좀비는 '늑대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지만 인권도, 권리도, 법도 없는 그들은 조금 불쌍하지만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혹은 죽여야 하는, 혹은 '치료해야 하는'(숱한 좀비영화에서 결국 원하는 것은 그들의 치료가 아니겠는가? 결국 그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치료는 우리가 늘 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좀비는 죽여야 제맛이다.) 존재일 따름이다. 법이 모든 인간을 포섭해버린 지금, 늑대인간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으므로(수용소는 철저히 가려져 있지 않은가? 죽여도 시원치않을 불법체류자도 법의 보호를 받는 엿같은 세상이 아닌가?) 우리는 좀비를 원한다. 3
결국 핵심은 이 영화가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철저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오독했다는 데에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영화의 제목 '나는 전설이다'의 어색함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legend'는 세 가지 정도의 뉘앙스를 품고 있는데, 1. A legend is a very old and popular story that may be true. 2. If you refer to someone as a legend, you mean that they are very famous and admired by a lot of people. 3. A legend is a story that people talk about, concerning people, places, or events that exist or are famous at the presnet time.
이 중 영화의 legend가 의미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2번이다. 말그대로 네빌은 '전설적인- 한마디로 걍 레전드'가 되었다. 그는 매우 어드마이어해야 하는 인물인데, 백신을 통해 인류를 구원했기 때문이다. 늑대인간을 제외한, 남아있는 모든 어랏오브피플은 그를 전설의 영웅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그는 전설이다'라고 얘기했어야 한다.
문제는 소설에서 리처드 매드슨이 의도한 레전드는 다르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창백한 얼굴로 그(네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 그러한 깨달음은 그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과 오버랩되었다. 경외,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그렇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벌이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 아닌 생명을 앗아간 보이지 않는 유령이었다. / 로버트네빌은 이 땅의 신 인류를 내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파괴돼야 할 저주이자 검은 공포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새 출발이라는 건가? 최후의 마비가 그의 수족을 채우기 시작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또 다른 시작인 거야. 죽음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공포. 영원의 요새를 정복한 새로운 미신. 이제 나는 전설이야.
근대적 괴물의 가장 높은 고지에 '좀비'가 있다고 한다면(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흡혈귀와 프랑켄슈타인을 묘하게 혼합하여 좀비의 첫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리처드 매드슨의 상상력은 위대하다. '근대적 정상성의 문제'에 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마지막 대목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추악한 욕망기계인 좀비는 기실 깜둥이이고("어차피 그들을 이길 수는 없다. 이미 깜둥이 놈한테 한 번 당하지 않았던가?(39면)"), 빨갱이이며("핵폭탄 때문인가요?" / "우리가 이겼다고 그러더군요(66면)"), 여자인 동시에("침대에서 여자를 끌고 나왔다. 넌 왜 매일 여자들한테만 실험을 하는거지?(73면)", 야만인이다("그의 표백된 얼굴에는 야수의 흉포한 표정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207면)"). 4
그러므로 이성적이며 탐구적이고 수학적인 인류 문명의 마지막 생존자 네빌의 죽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공포를 안겨준다. 그것이 문명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과 사회의 교체를 통한 영속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탁월하게 잔인하고 인간만큼 이성적인 새로운 돌연변이들은 네빌을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므로 그들이 인간만큼 잔혹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다행일지 모른다. 영화가 백신을 통한 인류의 영속을 보여준다면, 그러므로 인류의 영속이야말로 보존해야할 가치로 만든다면, 소설은 흡혈귀로의 교체를 통한 인류의 영속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끔찍한 일이 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의 포인트는 인간이 아니라 흡혈귀, 깜둥이와 빨갱이, 여자와 야만인과 같은 '늑대인간'이 된다. 영속하는 것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전설'이다.
다시 말해 소설에서 의미하는 레전드는 명백히 3번이다. '흡혈귀의 전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흡혈귀 자신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과정은 흥미롭다. 좀비가 된 흡혈귀는 어이없게도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전설은 전설이되 현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전설이야(I am legend)'라고 외치는 네빌의 목소리는 어색하지 않다. 그는 전설이 사실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현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전설이 현실을 규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스스로 흡혈귀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전설이면서, 철저하게 3번적인 의미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된다. 흡혈귀들의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쨌든 ('늑대인간'과 같은) '전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1인칭 '나'는 인간 사회의 비극적 영속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소설에서도 '나'가 우스꽝스럽다면, 그것은 철저히 '영원히 다시 살아나는' 코미디언 올리버 하디로서의 의미로서만 그러하다. 톰과 제리와도 같은 올리버 하디는 좀비인 코트만이면서, 네빌 자신이다.("네빌은 (코트만이 맞은 총을) 자신이 맞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뜨끔했다(206면)")
여기서 바로 전설의 속성이, 타자와 비정상의 속성이 드러난다. 정상이 비정상이 되고,(코트만 -> 좀비 코트만 / 네빌 -> 전설로서의 네빌)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좀비 -> 신좀비)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누가 전설이고, 누가 토크 댓하는 피플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이 3인칭 소설인 '나는 전설이다'의 1인칭 제목이 의미있는 이유이다.(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이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 아직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분석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 홀로 남겨진 인간의 이미지. : 근대적 상실감? 근대적 고독?
시대상의 차이. (핵)전쟁에 대한 공포(면역도 전쟁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물론 소설에서도 바이러스에 대해 언급하긴 하지만. //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 -> 혹성탈출과의 유사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것.
-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숱한 뮤직비디오를 통해 숱한 뮤직비디오상을 수상했다. 이를 통해 영화가 갖는 경쾌한 리듬감을 이해할 수 있음. 사소한 하나의 문제는 그가 단지 뮤직비디오감독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 [본문으로]
- 안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생존자들의 도시로 갈 수 있었다. 종교적 믿음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필수적이다. [본문으로]
- 아직은 좀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으므로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좀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윤리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본문으로]
- 프랑켄슈타인이 '욕망만이 존재하는 기계로서의 괴물(이것이야말로 늑대인간이다)'이라는 근대적 환상을 만들어냈다면(사이보그는 안된다. 그 기계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한다), 좀비는 '(인공의) 유전적 이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욕망 기계의 정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